본 후기는 의뢰인과의 통화, 카톡 등 실제 사례를 토대로 의뢰인 시점에서 각색한 내용입니다.
회사가 시키는 대로 일했을 뿐인데
IT 업계에서 십수 년을 일했다. 소프트웨어 개발도 하고, 건설 현장에서 PM도 하고. 그러다 어쩌다 한 중소업체에 들어가게 됐다.
회사 이름은 굳이 적지 않겠다. 대표는 J라고 하자.
J 대표는 사람을 부려먹는 데 도가 튼 사람이었다. 결재 라인이고 뭐고 없었다. 본인이 필요하면 전화 한 통, 문자 한 통으로 지시가 떨어졌다.
그렇게 1년쯤 일하다 임금 체불 문제가 터졌고, 결국 회사를 나왔다.
'두 번 다시 엮이지 말자.'
분명 그렇게 다짐했었는데, 반년쯤 지나 J 대표한테서 다시 연락이 왔다.
"내가 서울시랑 큰 계약 하나를 따냈는데, 우리 회사 이름으로 직접 나서면 안 되는 건이야. 다른 업체를 끼워서 진행해야 하는데, 자네가 좀 도와줘."
거절이 어려웠다.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할 시기였고, 어쨌든 한 번 같이 굴러본 사람이니까. 결국 다른 회사 소속으로 들어가서, 사실상 J 대표 회사의 현장 PM 일을 다시 맡게 됐다.
계약서를 전달했을 뿐, 도장을 찍은 적은 없다
J 대표가 부탁한 건 자기네 회사 이름이 외부에 드러나지 않도록 중간에 끼워줄 업체 하나를 소개해 달라는 거였다.
예전 거래처였던 C사가 떠올랐다. 이전에 한 번 비슷하게 일을 도와줬던 곳이었다. 연락을 했더니 C사도 흔쾌히 협조하기로 했고, 양쪽 사이에 계약서가 오갔다.
내가 한 일은 딱 계약서 전달까지였다.
애초에 내 소속은 J 대표의 회사가 아니었기에, 직인을 찍을 권한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회사 안에서는 관리부장 L이 모든 결재를 쥐고 있었고, J 대표가 그렇게 못박아두었다.
"보고는 L 부장한테 해. 내가 일일이 받기 어려우니까."
그 뒤로 현장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L 부장한테 메일을 보내거나 전화를 돌렸다. 계약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내가 초안을 만들어 L 부장한테 넘기면, L 부장이 검토하고 직인을 찍는 식이었다.
C사와의 공사계약서도 그렇게 마무리됐다.
도장은 L 부장이 찍었고, 나는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다. 양쪽 회사가 무선으로 도장을 찍어 주고받는 방식이었으니까.
어느 날, 경찰서에서 걸려온 전화
그 무렵 그 회사 일을 또 그만뒀다. 이후로는 J 대표와 따로 연락할 일도 없었고, 한참을 잊고 살았다.
그런데 그렇게 평화롭던 어느 날,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사문서위조 및 업무상배임 혐의로 고소가 들어와서, 조사받으러 나오셔야 합니다."
머리가 멍해졌다.
'사문서위조? 내가? 누가?'
고소인은 J 대표였는데, 받아본 고소장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① 내가 아무런 권한도 없이 회사 도장을 무단으로 반출해서 C사와 8천여만 원짜리 공사계약을 임의로 체결했고, 그 결과 회사에 약 5,394만 원의 손해를 입혔다. ② 그 전 부산 사업 때도 임의로 시중가보다 비싸게 장비를 구입해 약 4,020만 원의 손해를 입혔다. 그러니 고소한다.
손해액 합계 9,400만 원
죄명은 사문서위조, 위조사문서행사, 업무상배임
기가 막혔다.
모든 일은 J 대표 지시대로 굴러갔고, L 부장이 결재했으며 J 대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고 있었다. 그 전 부산 사업 건도 마찬가지였다. 거래처를 연결해 달라고 부탁한 사람이 J 대표였고, 나는 그저 다리만 놓아준 입장이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발뺌하고 있는 거였다.
알고 보니 L 부장과 J 대표 사이에 임금 체불 문제로 갈등이 터졌고, 그 와중에 나까지 묶어서 고소를 한 모양이었다.
'왜 내가 이 사람들 싸움에 끼어 있는 거지...'
이후 피의자 신문을 받으러 갔다. 있는 그대로 진술했지만, 분위기가 영 좋지 않았다. 변호사를 알아봐야겠다 싶었다.
변호사를 선임하고
여러 군데 상담을 다닌 끝에 법무법인 이현을 선임했다.
변호사가 가장 먼저 한 건 정보공개청구였는데, 고소장과 내가 했던 피의자신문조서를 받아내서 처음부터 다시 들여다봤다. 고소인 측이 어떤 논리로 나를 몰아세우려 하는지, 어디서 사실이 비틀려 있는지 한 줄 한 줄 짚어 나갔다.
쟁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 사문서위조
내가 도장을 찍었다는 주장이었는데, 이건 명백히 사실이 아니었다. 회사 직인을 반출할 권한도 위치도 아니었다는 점, 실제로 도장을 찍은 사람은 L 부장이었다는 점, 계약서가 무선으로 오갔다는 정황. 이런 것들을 자료로 정리해 입증해야 했다.
둘, 업무상배임
회사 몰래 계약을 체결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내가 J 대표와 L 부장에게 보낸 이메일을 모조리 모았다. 서울시 담당자와의 회의 내용을 J 대표에게 직접 보고한 메일, L 부장과 주고받은 계약서 검토 메일, 그 전 사업의 정산 보고 메일까지…
"이메일 기록이 곧 증거입니다."
회사 내부 보고가 서면 결재 대신 이메일로 굴러갔다는 점, 그리고 그게 다름 아닌 J 대표가 시킨 방식이었다는 점. 변호사는 이걸 의견서에 하나하나 풀어 담았고, 그렇게 시간을 들여 정리된 변호인 의견서가 경찰에 제출됐다.
불송치, 혐의없음
얼마 뒤, 경찰서에서 불송치(혐의없음) 결정이 내려졌고, 통지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피의자가 해당 사업의 현장 PM으로 근무한 사실은 인정되나, 관련 계약 내용에 대해 대표이사·부사장·부장 등에게 이메일을 통해 수시로 보고를 진행해 온 점이 확인되었다. 문제가 된 공사계약서는 피의자가 직접 작성한 것이 아니라, 계약 체결 및 도장 날인 권한이 있는 다른 임원에 의해 체결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증거 불충분.
되돌아보니
솔직히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이메일 기록이 남아 있었고, 변호사가 그걸 제대로 정리해줬으니까. 혼자 대응했다면 피의자 신문에서 한 진술만으로 송치됐을 수도 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찾아보니, 직장에서 시키는 대로 일했는데 나중에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고 한다. 보고 라인이 비공식적이거나 회사 내부 절차가 엉성한 곳일수록 위험하다.
무혐의를 받고 나서도 한동안은 분이 가시지 않았다. 시키는 대로 일한 죄밖에 없는데, 1년을 피의자로 살아야 했으니까.
비슷한 일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 변호사부터 만나보시길…